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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읽은 책을 가두는 작업

200627 미움받을 용기

 

 

 

심리학은 장르가 '과학'으로 분류되는 것이 의아스럽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내어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책이 그것의 꺼풀을 한장 벗겨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의 심리학을 쉽게 엮어놓은 책이다.

아들러는 심리학의 3대 거장이라고 불리지만,

프로이트나 융에 비해 아들러라는 철학자의 이름은 대중들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사실 <미움받을 용기>를 읽기 전에는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대중들과 철학적 토론을 펼치며 가르침을 설파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강의를 통해 세속적 명예와 부를 얻었던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은화 한닢 받지 않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그렇게 가르침과 토론을 주구장창했지만 스스로 쓴 저서 하나 남기지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소크라테스의 언어들은 죄다 그의 제자 플라톤이 글로 남겨 지금껏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고로 플라톤이 없었으면, 심리학적 사고의 표어가 되어버린 "너 자신을 알라" 따위의 문장도,

우리 곁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 전체를 감수한 기시미 이치로는 자신이 아들러에게 플라톤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엮어준 고미 후미타케는 이치로의 플라톤이 되겠다고 말했다.

아들러는 꽤나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의 가르침을 그리도 엮어대려고 하는 이가 많으니.

 

첫번째로 책을 읽었을때는 아마 화가 치밀어 오르고 굉장히 불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대에서 두번읽고, 사회에 나와 또 두번째, 총 4번을 읽었는데도,

새롭고, 또 불편하다.

그만큼 이책은 경계해야 할 것도 많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내가 그토록 이 책을 여러번 읽어댄 이유는

'이렇게 살면 정말 행복해질수 있지 않을까?' 여서였다.

살면서 보고, 또 들었던 많은 행복지론들 중에

가장 설득력이 있었음이 분명해.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이 책이 놓는 인생의 커다란 난제 한가지.

살면서 겪게 될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인생은, 세계는 단순하다.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관을 다시 바로잡아 어떻게 행복해질수 있는가로 논리를 펼쳐나간다.

딱 그것 뿐이다.

 

그리고 이를 보는 몇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첫번째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트라우마'이론을 철저히 부정한다.

이는 크게 봐서 인과론적 사고를 거부하고 목적론적 사고를 내세운다.

어린 아이가 어렸을때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고, 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나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해서 그 상처때문에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다 라고 말을 한다.

아들러의 목적론 관점에서 보면, 그 상처 때문에 맺기 힘든것이 아니고,

자기가 인간관계를 맺어나가기 싫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어린시절 상처를 끄집고와서 변명을 한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어떠한 목적에 따라 살게 되어 있고,

경험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부여한 의미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보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것이고,

본래의 생활양식을 버리고 변하려면 얼마든지 변할수 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라고 말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개의 단어, 용기.

이런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지는가?

 

 

 

 

 

좋았던 것은, 인간관계에서 '자유'라는 개념을 확실히 얻을 수 있었다.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 자체가 자유이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라는 말을 확실히 이해했고 공감이 갔다.

또한 왜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지,

그로부터 비롯된 수평관계, 과제의 분리, 공동체 감각등의 이야기는 불편하면서도 재밌었다.

자기수용>타자신뢰>타자공헌 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에 대한 마인드,

그로부터 결국 행복으로 이어지는 공헌감까지.

 

키네시스와 에네르게이아의 사고를 인생과 비교하면서 이야기하는 것 또한 좋았다.

시점과 종점이 있는 키네시스의 관점은 결국 결과를 중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에네르게이아의 관점으로,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고,

수억겁의 시간도 찰나의 연속이라는 <구운몽>의 가르침에 다시 한번 무릎을 탁! 치며,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기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불편했던 이유는 결국,

굳게 믿었던 얼음장 같은 세계관을 자꾸 망치로 두드려대기 때문이었다.

특히 타자의 신뢰, 타인에 대한 평가 등이 그렇다.

나는 아직도 아들러의 심리학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결국 아들러의 심리학을 믿는다는 이야기인가?

 

모든것은 용기의 문제라고 하니, 오히려 골이 더욱 아파온것이 사실이다.

지금껏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내 능력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아쉬운대로 포기하고 능력을 탓하며 살 수 있었다.

그치만 용기는, 용기는 내면 그만이고, 두려움 같은 것은 떨쳐버리면 그만인지라, (황금나침반, 2005)

그것도 못하고 있는 나를, 이제껏 못해왔던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또 대화체의 형식은 책을 빠르고 재밌게 읽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공감할 수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청년이 유레카해버리거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묻지 않는 청년을 볼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책을 읽을때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 또한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욱) 위험하다.

이 역시 받아들일것은 받아드리고,

생각해볼것은 충분히 생각해보고,

바꾸어야 할것과 내쳐야할것은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인생에는 진리가 없고 선택에는 정답이 없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온갖 구슬들이 널브러진 내 사고 안에서

사색과 경험을 통해 적절히 꿰어나가는 것이 정도의 길일테다.

그러한 길을 걷는다면, 찰나의 순간에서 용기를 내볼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