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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법정과 스트릭랜드 사이

5/16 주의산만을 잡는 법

학위인사(學爲人師)
행위세범(行爲世範)


 
학문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야 하고 행실은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번에 전공 관련된 CS/DS분야를 공부하면서 이와 같은 말이 와닿기 시작했다.

더불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 가르치는 행위가 보람이 있을 것이고,

세상의 모범 이 되는 것은 보람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되리라 생각하며

이 지긋지긋한 과정을 위와 같은 생각들로 채우면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좀 더 즐기면서 해볼수 있진 않을까라는, 낭만적인 생각이 들었다.

 


 

최근 코로나사태로 많은 학생들이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다.

내가 처음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한게 중2때였는데, 당시에 Mbest라는 메가스터디 중학생용 인강사이트가 있었다.

거기에 장하나라는 과학선생님의 수업을 처음으로 엄마카드로 결제해서 수강했었다.

그때 수업을 들으면서 느꼈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중학생이 느낄정도로 뛰어난 강사의 말재주, 강의력, 교재 퀄리티,

특히 학교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부 실험마저 보여주는, 

어릴적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과학소년은 꽤나 재밌게 강의를 들었었다.

 

하지만 강의를 빨리 듣고 얼른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에 1.4배속으로 듣기 일쑤였고

(당시에 스페셜포스가 내 마음을 늘 들뜨게 했었지)

그마저도 집중을 하지 못해 인터넷 서핑(당시 네이버붐은 어린시절 나의 또 다른 자아였다.)을 하곤 했었다.

내 성격도 참 특이한게, 딴짓하면서 강의 들은 주제에 강의내용이 이해가 안가면 다시 되돌려보는 비능률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

당연스럽게도 딴짓을 하다 오니 강의흐름이 끊기기에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았고,

사실상 1분정도 되돌아가서 다시 듣는다해도 이해는 가는데 뭔가 찝찝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결국 1.4배속으로 들어도, 강의에 머무른 시간은 원래 시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길때가 많았고,

내가 이해한 정도나 학습의 효과도 좋지 않았다.

 

웃긴게 1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학강의를 들을때 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이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되돌아가서 보지 않는다.

그냥 대충 키워드만 적고 속으로 생각한다.

"시험 때 구글링하면서 공부해야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5년 9월 발표한 보고서는 “학교에서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보다 적은 시간 활용하는 나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높았다” 라며, 인터넷 강의를 비롯한 컴퓨터 활용수업에 태클을 걸었다. 교실에서 하루 평균 컴퓨터 이용 시간이 적은 국가일수록 학생들의 성취가 뛰어났다. 한국(9분), 중국(상하이 10분·홍콩 11분), 일본(13분) 등이 모범 사례로 제시됐다. 프랑스에서는 학교에서 태블릿PC 사용이 독해력 학습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미국의 교육평론가 제프리 셀링고는 2014년 책 <무크U: 온라인 교육의 중도포기 이유>에서 ‘무크는 학습 동기가 강하고 학습 능력이 뛰어난 5%의 자발적 학습자들에게만 효과적일 뿐, 대다수 학생에겐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고 했다.

최근에 읽었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도 다양한 연구사례를 통해 증명해보였지만, 컴퓨터나 태블릿을 이용한 학습은 주의산만과 중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고 꾸준히 경고해왔다. 이는 기본적으로 컴퓨터나 태블릿, 스마트폰이 "공부용"이 아닌 다른 다양한 용도로 쓰이기 때문인데, 특히 그 다양한 용도 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오락"이나 SNS 같은 "중독보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가득차 있는 도구들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 중독과 주의산만은 꽤 위험하다.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공부의 미래> 저널을 쓰신 구본권 선생님은 교육에서 지식 전달과 습득보다 학습 동기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교실이 없는 시대가 온다>의 저자 존 카우치는 “무엇을 배우느냐보다 왜 배우느냐, 즉 동기부여가 더 중요하다” 라던지,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기술은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능력인데, 교사와 학부모가 이를 가르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라는 미국 작가 이얄의 말 또한 같은 맥락에서 공감이 가는 바이다.


 

아까 인강이야기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도 그렇게 인강을 많이 들었지만 학습효과가 떨어지거나 주의산만하게 다른짓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왜 그런고 하니, 그때는 공부하는 목표가 강했었기 때문 이다.

즉, 학습하는 목표와 동기가 지식을 전달받고 습득받는 것만큼 내게 중요했기에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고등학교 시절동안 만큼은 위의 기사에서 말하는

"온라인 교육에서 학습 동기가 강하고 학습 능력이 뛰어난(?ㅎㅎ) 5%의 자발적 학습자" 였던 것이다.

 

결국 주의산만이나 중독은 집중력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김민식 작가는 이러한 중독이나 주의산만에서 오롯히 집중력을 갖는 방법으로 독서를 꼽는다(역시.. 기승전독서)

 

나도 독서가 해결방법이 될 수 있음을 공감하고, 또 하나 덧붙이자면 "사색"하는 법을 기르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사색은, 펜을 귀에 꽃고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보며 명상하자는 것이 아니고,

인터넷을 활용한 사색을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제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게 되었다.

아무리 중독이니 주의산만이니 해도, 그 도구가 주는 편의성을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정리하는 뇌>를 보고 적절히 도구를 시간적으로 통제를 하고, (하루 카톡 3번 보기, 일정시간 전원끄기 등)

구글링을 하거나 유튜브를 볼때 이를 글로 정리하고, 잠시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즉, 어느정도 정보의 소비자로만 포지션을 잡지 않고 정보의 생산자로써도 위치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양의 정보를 받고 있다.

하루에도 수백, 아니 수천가지의 정보를 마주친다.

마주치면서 우리는 똑똑해지고,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양질의 지식을 습득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5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면 사라지는 이 html의 태그들은 진정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남는건 알고 있다는 뻔뻔함과 늘어나는 중독과 산만함 뿐.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2016년 한국을 찾아 인공지능 시대 미래 교육의 방향에 대한 연설 중 "현재 학교 교육의 80~90%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해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직면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중요한 기술일 것이다" 고 말했다.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무지의 발견’이 메타인지다. 인터넷 시대의 수없이 많이 지나치는 정보들에서 앎으로, 조금이라 내것으로 만들려면, 독서과 사색이 다시금 중요해진다. 이는 우리의 주의산만이나 중독의 즉각적 보상 프레임을 조금이나마 멀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는 무소불위의 힘과 능력이 주어지는 '절대반지'가 나온다.

구텐베르크가 활자술을 발명해 책이 쏟아져나오기 이전에는 아마 "책"이 절대반지와 같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 한권이 무척 비싸고 귀했다.

따라서 책에 있는 지식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었고, 운좋게 그것을 획득한 사람은 힘과 능력이 생겼다.

 

책을 많이 챙기면 챙길수록 본인은 성장했고,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를 주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 절대반지가 집집마다 수십 수백권씩 있을테지만 말이다.

 

오늘날 절대반지를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꼽을 것 같다.

세상 거의 모든 지식이 들어가있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으며,

돈이 되는 것이 있고,

인터넷 위에서는 세상이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이 절대반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러한 절대반지를 추구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이야기해보았다.

그리고 이를 경계하고, 철저히 대처할 수 있는 실전적 지침까지도 배우고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더 시간을 쏟고 애정을 가져야 하는건 절대반지가 아니라 흔한반지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막자.

흔한반지로 새로운 내적동기와 집중력 두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앎이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라고 자로에게 설파했고,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현명한 사람이다”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절대반지가 삶속에 뿌리내려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https://free2world.tistory.com/2457  , 공짜로 즐기는 세상]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8625.html . <공부의 미래> 저널, 구본권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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